북위 효명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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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위 효명제는 510년에 태어나 515년 선무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북위의 황제이다. 효명제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모친인 호태후가 섭정하였으며, 호태후의 섭정 기간 동안 불교 숭상과 사치로 인해 재정이 악화되고, 6진의 난이 발발하는 등 혼란스러운 정국을 겪었다. 528년에는 호태후에 의해 독살되었으며, 그의 죽음 이후 북위는 더욱 혼란에 빠져 결국 동위와 서위로 분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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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0년 출생 - 북위 효무제
북위 효무제는 광평왕 원회의 아들로, 고환에게 옹립되었으나 권력 다툼 끝에 우문태에게 의탁했다가 독살되었으며, 그의 사후 북위는 동위와 서위로 분열되었다. - 528년 사망 - 영태후
영태후 호선진은 북위 선무제의 후궁으로 효명제를 낳아 섭정을 시작, 불교 장려 등 문화적 업적을 남겼으나 권력 남용과 부패로 북위 쇠퇴를 가속화했고 효명제 독살 후 원조를 옹립했다가 이주영에 의해 폐위되어 황하에 익사했다. - 528년 사망 - 원조 (북위)
원조는 북위의 황제였으나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영태후에 의해 옹립되었다가 이주영에 의해 폐위되어 호태후와 함께 익사하며, 그의 삶은 당시 북위의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북위 효명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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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전체) | 원후 (元詡) |
씨족 | 원 (元) |
묘호 | 숙종 (肅宗) |
시호 | 효명황제 (孝明皇帝, 효성스럽고 이해심 있는 황제) |
출생 | 510년 |
사망 | 528년 3월 31일 |
매장지 | 정릉 (定陵) |
아버지 | 선무제 |
어머니 | 영태후 호씨 |
배우자 | 후궁 |
자녀 | 오태 여황 |
왕조 | 원 |
왕가 | 북위 |
통치 | |
즉위 | 515년 2월 12일 |
퇴위 | 528년 3월 31일 |
이전 통치자 | 선무제 |
다음 통치자 | 오태 여황 |
연호 | 희평 (熙平): 516년–518년 신귀 (神龜): 518년–520년 정광 (正光): 520년–525년 효창 (孝昌): 525년–527년 무태 (武泰): 528년 |
2. 생애
510년 뤄양에서 태어난 효명제는 512년 황태자로 책봉되었고, 515년 선무제가 사망하자 황제로 즉위했다. 즉위 당시 나이가 어려 처음에는 고양왕 원옹과 임성왕 원징이 정사를 맡았고, 이후 어머니 호씨가 임조칭제하며 실권을 쥐었다.
영태후는 섭정 기간 동안 불교에 심취하여 전국에 사탑을 건립해 재정을 악화시켰다.[1] 또한 선비족의 전통을 무시하는 급진적인 한화 정책을 추진하여 6진의 난을 초래, 북위 멸망의 원인을 제공했다.[1]
효명제 초년에는 대승의 난이 일어나 허베이가 동요했고, 520년에는 시중 원차와 중상시 유등이 권력을 장악하여 호태후를 유폐했다. 그러나 원차의 전횡으로 북위 조정은 더욱 문란해졌다. 523년 6진의 난이 발발하고, 서주의 원법승과 동예주의 원경화 등이 남조 양에 귀부하는 등 북위는 혼란에 빠졌다.
525년, 호태후가 복귀하여 다시 정권을 잡았으나, 6진의 난은 더욱 확대되었다.
528년, 효명제는 호태후를 견제하기 위해 이주영과 손을 잡으려다 발각되어 19세의 나이로 독살당했다. 이후 호태후는 효명제의 딸을 남자라고 속여 황위에 올렸으나 발각되자 원조를 옹립했다. 그러나 이는 이주영의 반발을 사 하음의 변을 초래했다.
2. 1. 즉위 과정
510년 3월, 뤄양의 선광전 동북쪽에서 태어났다. 512년,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515년 1월, 선무제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북위의 황제로 즉위하게 되었다. 이때 북위의 관례에 따르면 황태자가 즉위할 때 황태자의 생모는 죽임을 당해야 했으나, 선무제는 호소의의 목숨을 살려주었다.효명제는 즉위 당시 나이가 어려 직접 정치를 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고양왕 원옹과 임성왕 원징이 정사를 맡았다. 그해 8월, 어머니인 호씨가 황태비에서 황태후가 되어 선광전에서 임조칭제하며 조정의 실권을 쥐게 되었다. 관료 우충과 원옹, 원징은 고황후로부터 권력을 빼앗고 고조를 매복하여 살해한 후 고황후를 폐위시켰다. 이후 호태후는 다섯 살 된 황제를 대신하여 섭정을 시작했다.
2. 2. 호태후의 섭정과 권력 투쟁
영태후는 어린 효명제를 대신해 섭정을 하면서 불교에 심취하여 전국에 사탑을 건립, 재정을 어지럽혔다.[1] 이는 국내 도적 봉기와 선비족의 불만을 야기, 523년 6진의 난을 초래하여 북위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1]6진은 북위 수도 평성을 지키던 군사 기지로, 좋은 대우를 받았으나 수도 이전과 급진적인 한화 정책으로 불만이 커져 6진의 난을 일으켰다.[2]
호태후는 총명하고 이해력이 뛰어났지만, 부패에 관대하고 문란한 사생활을 했다. 515년, 부패한 관리 위안미(元謐)를 요직에 임명했고, 비판을 장려했지만, 부패 방지 제안은 시행하지 않았다. 열렬한 불교 신자로 뤄양에 웅장한 사찰을 건설, 효명제도 그녀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효명제는 학문, 국사보다 황실 정원에서 시간을 보냈다.
519년, 군인이 문관이 되는 것을 금지하는 정책에 반발한 폭동이 발생, 호태후는 주동자들을 처형했지만 정책 변경은 거부했다. 이 사건은 북위 붕괴의 시작점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호태후는 관리들에게 과도한 포상을 하여 국고를 탕진, 각 지방에 불탑 건설을 명령하여 백성 부담을 가중시켰다.
520년, 호태후는 효명제의 숙부 원역과 불륜을 저질렀고, 원역은 행정부 개혁을 시도했으나 원차와 유등의 쿠데타로 살해, 호태후는 가택 연금되었다. 원차는 섭정이 되었지만 무능, 부패하여 농민 반란을 야기했다. 520년, 원시가 호태후 복위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523년, 6진의 난 발발로 북위는 혼란에 빠졌다. 525년, 원법승이 반란, 남조 양에 항복했다. 원차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타 호태후, 효명제, 원용은 원차를 제거, 호태후가 다시 섭정했다.
호태후는 정엄에게 권력을 주었고, 농민 반란은 계속되었다. 호태후는 반란군 성공 소식을 듣기 싫어하여 측근들이 좋은 소식을 꾸며 보고, 장군 증원 요청을 거부했다. 양나라는 북위 혼란을 틈타 수양 등 국경 도시를 점령했다.
528년, 효명제는 호태후 견제를 위해 이주영과 손을 잡으려다 발각, 독살되었다.
2. 3. 6진의 난과 북위의 혼란
영태후는 어린 효명제를 대신해 섭정하면서 불교에 심취하여 전국에 사탑을 건립, 재정을 악화시켰다. 이로 인해 국내에 도적이 들끓었고, 한화 정책에 불만을 품은 선비족들이 523년 6진의 난을 일으켜 북위 멸망의 원인을 제공했다.[1]6진은 본래 북위 수도 평성을 지키는 6곳의 군사기지로, 왕족 출신 유력자들이 국경을 수비하여 좋은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급진적인 한화 정책과 수도 이전으로 대우가 소홀해지면서 불만이 쌓여 6진의 난이 일어났다.[2]
6진의 난은 우여곡절 끝에 진압되었으나, 효명제는 영태후를 제거하려다 발각되어 독살당했다. 이후 영태후는 두 차례 후계자를 세워 권력을 유지하려 했지만, 6진의 난 진압 과정에서 대군벌로 성장한 산서성 삭현 지방의 흉노족 이주영이 군대를 이끌고 낙양(洛陽)에 들어와 효장제(孝莊帝)를 옹립했다.[2]
528년, 이주영은 하음의 변을 일으켜 영태후와 후계자 원조를 황하에 던져 죽이고, 승상 이하 대신 1,000명을 처형했다.[2]
523년, 관료 이충(李崇)은 대대로 유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6개의 북부 군사 주둔지에 머물도록 강요받았던 선비족들이 불만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위안 차와 효명 황제에게 주둔지를 성(省)으로 바꾸고 백성들에게 다른 성의 백성들과 동일한 권리를 부여할 것을 제안했다. 위안 차는 거절했다. 그해 말, 회황(懷荒, 현재의 장자커우, 허베이성)과 워예(沃野, 현재의 바옌나오얼, 내몽골 자치구) 주둔지의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북위군은 이 반란을 신속하게 진압할 수 없었고, 반란은 곧 6개 주둔지뿐만 아니라 사실상 제국 전체로 퍼져나갔다. 주요 반란군은 다음과 같다.
반란군 지도자 | 근거지 | 주요 내용 |
---|---|---|
포륙한 발릉(破六韓拔陵) | 워예 주변 | |
호심(胡琛) | 고평 주둔지(高平, 현재의 구위안, 닝샤 회족 자치구) 주변 | 고차 부족의 추장 |
모절대제(莫折大提) -> 모절념생(莫折念生) | 진주(秦州, 대략 현대의 톈수이, 간쑤성) 주변 | 스스로 진나라 황제를 선포 |
525년 4월, 호태후가 다시 조정을 보게 되었다. 원차는 병권을 박탈당했고, 이듬해 처형되었다. 호태후의 집정 아래 북위의 조정은 이완되었고, 육진의 난은 확대될 뿐이었다.
효명제의 초년에는 대승의 난이 일어나 허베이가 동요했다. 이윽고 시중 원차와 중상시 유등이 궁중에서 발호하여, 520년에는 효명제에게 정권을 돌려준다는 명목으로 호태후를 유폐했다. 원차와 고양왕 원옹의 양두 체제가 성립되었지만, 실제로는 원차가 북위의 조정을 전단하여 문란을 극에 달하게 했다.
528년 2월, 효명제는 호태후를 견제하기 위해 이주영과 손을 잡으려 했지만, 이 사실이 발각되어 독살되었다. 19세로 사망했다.
2. 4. 효명제의 죽음과 북위의 분열
영태후는 어린 효명제를 대신해 섭정하면서 불교에 심취하여 전국에 사탑을 건립해 재정을 어지럽혔다. 이로 인해 국내에 도적이 봉기하고, 그동안 누적된 한화 정책에 대한 선비족의 불만이 523년 6진의 난을 초래하여 북위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2]6진은 원래 북위의 수도 평성을 지키던 6곳의 군사기지로, 왕실 계통의 유력자들이 머물면서 국경을 지켰기에 대우가 좋았다. 하지만 급진적인 한화 정책과 수도 이전으로 인해 대우가 소홀해지면서 불만이 누적되어 6진의 난을 초래하게 되었다.[3]
우여곡절 끝에 6진의 난을 진압하였으나, 효명제는 영태후를 제거하려다가 발각되어 독살당했다. 이후 영태후는 두 차례에 걸쳐 후계자를 세워 권력을 유지하려 하였으나, 6진의 난 진압 과정 중 대군벌로 성장한 산서성 삭현 지방의 흉노족 이주영이 군대를 이끌고 낙양(洛陽)에 들어와 효장제(孝莊帝)를 옹립했다.
이주영은 528년 영태후와 후계자 원조를 황하에 던져버리고, 승상 이하의 대신 1,000명을 처형하는 하음의 변을 일으켰다.
528년, 효명제의 총애를 받던 빈 반씨가 딸을 낳았다. 그러나 호태후는 거짓으로 반씨의 아이가 아들이라고 선언하고 사면령을 내렸다.
이 무렵, 18세의 효명제는 모친이 국정을 장악하는 것에 지쳐 있었고, 정엄과 서거를 더욱 멸시했다. 그는 몰래 병주(并州, 현대 산시성 중부)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장군 얼주영에게 밀사를 보내, 호태후에게 정엄과 서거를 제거하도록 강요하기 위해 낙양으로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얼주영이 상당(上黨, 현대 산시성 창즈시)으로 진격한 후, 효명제는 갑자기 마음을 바꿔 그를 멈추도록 사자를 보냈지만, 소식이 새어나갔다. 이에 정엄과 서거는 호태후에게 효명제를 독살할 것을 조언했다. 호태후는 그렇게 했고, 처음에는 반씨가 낳은 효명제의 "아들"이 그를 계승할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그 "아들"이 실제로는 딸임을 인정하고, 대신 2세의 원조를 효명제를 계승하도록 선택했다. 원조는 임도왕 원보휘(元寶暉중국어)의 아들이었다. 얼주영은 이 조치를 인정하지 않고 곧 낙양에 도착하여 함락시키고, 호태후와 원조를 황하에 던져 익사시켰다.
효명제의 암살 후, 호태후는 처음에는 효명제의 딸을 남자라고 속여 황위에 올렸으나, 발각되자 효명제의 사촌인 임조왕 원보휘의 아들 원소를 옹립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이주영의 반발을 사 하음의 변에서 살해당했다.
그 후 북위에서는 안정적인 황위 계승이 끊어져 방계 황족(장락왕 원자유, 장광왕 원엽, 광릉왕 원공, 안정왕 원랑, 평양왕 원수)의 옹립과 폐위, 살해가 잇따라 일어났고, 6년 후인 534년에는 동위와 서위로 분열되어 각각에 꼭두각시 황제가 세워졌다.
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선무황제 원각 | (483~515) |
어머니 | 선무영황후 호씨 | (?~528) |
황후 | 황후 호씨 | (~554), 영태후의 종질녀 |
후궁 | 좌소의 호명상 | (509~527), 영태후의 종질녀[2] |
후궁 | 빈 고원의 | 고호의 아우 고아의 장녀 |
후궁 | 빈 왕씨 | |
후궁 | 빈 장씨 | |
후궁 | 충화 반외련 | |
황녀 | 여제 | (528~?), 어머니는 반외련. 호태후가 아들로 위장하여 황위에 올렸으나 하루 만에 폐위됨. |
후궁 | 충화 노영원 | (511~522), 노연의 아들 노도약의 장녀이자 북제 무성황후의 외가 언니[3] |
후궁 | 세부 정씨 | |
후궁 | 세부 최씨 | 최효분의 딸 |
후궁 | 세부 이씨 | 이소의 아들 이찬의 딸 |
4. 연호
효명제 | 원년 | 2년 | 3년 | 4년 | 5년 | 6년 | 7년 | 8년 | 9년 | 10년 | 11년 | 12년 | 13년 |
---|---|---|---|---|---|---|---|---|---|---|---|---|---|
서력 (西曆) | 516년 | 517년 | 518년 | 519년 | 520년 | 521년 | 522년 | 523년 | 524년 | 525년 | 526년 | 527년 | 528년 |
간지 (干支) | 병신(丙申) | 정유(丁酉) | 무술(戊戌) | 기해(己亥) | 경자(庚子) | 신축(辛丑) | 임인(壬寅) | 계묘(癸卯) | 갑진(甲辰) | 을사(乙巳) | 병오(丙午) | 정미(丁未) | 무신(戊申) |
연호 (年號) | 희평(熙平) 원년 | 2년 | 3년 신귀(神龜) 원년 | 2년 | 3년 정광(正光) 원년 | 2년 | 3년 | 4년 | 5년 | 6년 효창(孝昌) 원년 | 2년 | 3년 | 4년 무태(武泰) 원년 |
참조
[1]
서적
Emperor Xiaoming's biography in Book of Wei
Wei Shu
0528-03-31
[2]
문서
粛宗左昭儀胡明相墓誌銘
[3]
문서
魏故充華嬪盧氏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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